우리는 고대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야를 포함하면 ‘사국 시대’고, 거기에 부여까지 더하면 ‘오국 시대’가 된다. ‘부여’는 한국 고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와 성격을 지니는 나라다. 원조선을 빼놓고는 가장 먼저 국가로 등장했고, 무려 900년 가까이 존속했다.
둘째, ‘제1 동부여’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동쪽으로 이전하고 국명을 동부여라고 변경했다. 아들 금와왕은 해모수의 부인인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려왔고, 알에서 태어난 주몽은 성장하면서 대소 등 왕자들과 갈등을 일으켜 탈출했다. (동)부여는 285년 선비족에 수도가 점령되면서 왕은 자살하고, 백성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어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병합됐다가 494년 문자왕에게 항복했다.
셋째, ‘홀본부여’다. 《삼국사기》에는 ‘졸본(卒本)’으로 표기했지만, 광개토태왕 비문에 새겨졌듯이 ‘홀본(忽本)’이 정확하다. ‘홀’은 ‘골’ ‘마을’ ‘나라’를 뜻하는 부여계 말이다. 그러므로 홀본은 ‘홀’의 근본, 즉 원(原)부여일 가능성이 크다. 주몽은 소서노 등 연씨 세력이 장악한 홀본부여를 토대로 고구려를 건국했으므로, 《위서》 등에는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고 기록됐다. 2대 유리왕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왕의 성이 부여계인 ‘해모수’ ‘해부루’와 동일하게 ‘해(解)’씨였는데, 해는 ‘태양’을 의미한다.
넷째, ‘갈사부여’다. 부여는 왕위에 오른 대소가 주몽에게 패배하면서 위기에 직면했고, 왕자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동생 하나가 압록강 줄기인 갈사수가에 갈사부여를 잠시 동안 세웠으나 이내 고구려에 합병됐다.
다섯째, ‘제2 동부여’다. 부여가 285년 선비족에 수도가 점령됐을 때, 왕족 등과 주민들은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일대인 북옥저 땅으로 피난 갔다. 그런데 일부는 환국하지 않은 채 정착해 ‘동부여’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는데, 410년에 이르러 광개토태왕에게 정복당했다.
여섯째, ‘남부여’다. 백제는 홀본부여에서 내려온 소서노와 비류·온조 집단이 한강 하구에 세운 나라다. 처음부터 동명사당을 세우는 등 부여정통론을 표방했으며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出)고 했다. 538년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목표로 수도를 부여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명했다.
일곱째, 가설이지만 ‘왜부여’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여계의 기마집단이 남진해 일본 고대국가의 중핵을 이뤘다는 주장도 있다.(존 코벨, 《부여기마족과 왜》)
《삼국지》 등에는 부여가 3세기 무렵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고,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사방 2000리에 달하는 큰 나라였다고 기록됐다. 길림지역은 남만주의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입구여서 농토가 부족하고, 유물 등에서 확인되듯 강어업이 발달했다. 반면에 눈강과 송화강의 합류 지점은 넓은 송눈평원이 있어 사료의 내용처럼 토지가 넓고 비옥해 오곡을 생산하는 데 적합하고, 목축할 수 있는 초원이 발달해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가 나온다는 기록에도 어울린다. 또한 송화강과 눈강 등 긴 강과 큰 호수 덕에 어업도 발달했다. 특히 동쪽은 읍루와 물길계가 거주하는 숲지대로 이어져 질 좋은 목재와 약재, 산삼 등 작물이 산출됐고, 호피, 표피, 웅피, 담비가죽 등을 취급하는 모피산업이 발달했다. 그렇다면 대안(大安)과 농안(農安) 일대가 부여국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구려 때는 부여성이었고, 발해의 부여부가 설치됐다. 그런데 부여는 특이하게 마의하·훈춘·영고탑 등에서 많은 황금을 생산했다.
부여인은 농사를 짓고,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던 평화로운 사람들이었다. 반면 가장 먼저 북방 기마문화가 발달했다. 사냥철이 시작되는 음력 12월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벌였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등 유목민의 풍습을 유지했다. 이런 문화와 기술력 등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일본 열도로 진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훗날 만주에서 나라를 되찾는 독립군들은 ‘다물단’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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